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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 칼럼] 서경수 박사의 흉상
크은맘
2017. 7. 20. 11:16
http://opinion.mk.co.kr/view.php?year=2017&no=482548

이기복 본부장이 무궁화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연구원은 그동안 방사선을 이용해 분재용 무궁화를 개발했다. `꼬마`라는 신품종이다. 이를 통해 나라꽃에 대한 사랑을 되살리고자 한 것. 핵물리학자의 죽음을 다룬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그런 소설이었던가? 원자력연구원은 애국의 기반에 세워진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 같은 곳이다.
연구원에 들어가면 유일한 흉상 하나를 만나게 된다. 서경수 박사. 계속되는 야근과 가슴을 죄어오는 압박감 속에 살다가 51세의 젊은 나이에 작고한 원자력의 영웅이다.
한국이 원전 선진국이 되기까지에는 숱한 고비가 있었다. 첫발을 뗀 건 1982년. 한 달 전 가동을 멈춘 고리 1호기가 세워진 지 4년 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원전 국산화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첫 과제가 월성 1호기에 들어가는 핵연료봉을 우리 기술로 만드는 거였다. 연료는 원자력발전의 기초 중 기초다. 그게 돼야 원자로를 설계하고 원전을 짓는 게 의미가 있다. 서 박사는 그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원자력은 찬밥 신세였다. 고리 1호기는 사실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지어주고 우리에게는 열쇠만 준 발전소다. `그냥 돌리기만 하라`는 식이었다. 우리가 투입한 것은 시멘트와 자갈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연구진이 겪는 수모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작 감자에 방사선 쪼여 식품 개량한 것밖에 더 있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서 박사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을 의식해 더더욱 연구에 매달렸다. 핵연료봉 프로젝트는 연료봉 37개를 다발로 묶는 작업이다. 핵심은 성능 실험. 우리는 원자로가 없었다. 서 박사는 그걸 안고 캐나다로 날아간다. 비행기를 타기 전날 그는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말을 남겼다. 1년 후 서 박사는 한국에 낭보를 띄운다. 그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건 그로부터 4년 뒤였다.
어찌 서 박사뿐이겠는가. 그와 함께 동고동락한 김병구 박사. 그는 어렵사리 취득한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고국을 찾았다. 애국심 하나였다. 서 박사가 작고한 후 장인순 박사가 가세한다. 그 역시 시민권을 포기하고 연구원에 합류한 인물이다. 한국행을 고민하던 1979년, 그는 유학길에 오르던 때를 떠올렸다.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 어머니가 방에 들어왔다. 눈물을 흘리며 몇 마디 당부하시더니 하얀 종이에 곱게 싼 물건을 건네주고 조용히 방을 나간 어머니. 풀어보니 태극기였다. 그는 "과학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 국적은 있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산다.

이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1959년 원자력연구원 창설 멤버로 63년을 원자력에 매달린 한국 원자력의 대부 중 대부인 이창건 박사가 있다. 간첩으로 오해받으면서까지 원전 용지를 찾아 전국을 헤맸던 그다. 90의 나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난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로 저항할 거야."
원자력연구원은 30년 전 "엽전들이 무슨 원자력 자립이냐"며 고춧가루를 뿌리고 뒷다리를 잡았던 사람들의 비난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비난을 듣는다.
취재를 마치고 연구원 정문을 나설 때 무궁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손현덕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