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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서울 탐방 [11] *-

크은맘 2010. 7. 4. 22:08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서울 4 남서부 [1]
“한강의 역사는 나루터에 남아있네!”

 ‘여긴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이곳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쓰시다가 돌아가신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추운 겨울이 물러난 이른 봄날, 해 뜰 무렵에 누구보다 먼저 현충탑에 향 사르고 묵념을 올리니 마음은 한없이 경건해진다.


▲ 한강대교에서 바라본 여의도. 이 섬은 원래 넓은 모래밭이었으나 제방을 막고 흙을 돋운 뒤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수상도시로 변모했다.
지금 숲속의 장끼는 제 목소리로 까투리를 부르고,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도 제 빛깔을 갖고 있듯, 우리가 제 나라 말로 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모두 여기에 누워 계신 분들 덕분이 아니겠는가. 한 없이 일어나는 감사의 마음. 이번 달 서울 남서쪽 기행의 첫 대상지로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립현충원이 서울의 하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동작동 언덕에 자리 잡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길손은 아마도 한강이 서울의 중심이요, 대한민국의 상징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한강의 지명을 살펴보면,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엔 대수(帶水)라 했다.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엔 아리수(阿利水), 백제는 한수(漢水) 또는 욱리하(郁利河), 신라는 상류를 이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고 했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엔 한강을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고도 했다. 고려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列水)라고 불렀다. 또 모래가 많은 일부 지역을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엔 도읍을 적시는 물줄기라 해서 경강(京江)이라고도 지칭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여러 이름들은 사라지고 한수 또는 한강(漢江)이라는 이름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한편, 한강은 순 우리말 지명으로서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이라 한다. ‘한’은 ‘크다·넓다·길다’는 뜻이요, ‘가람’은 강의 옛말이니 한강은 곧 ‘크고 넓은 강’이란 뜻이 된다.

서울의 역사는 한강의 역사요, 한강의 역사는 나루터에 기록되어 있다. 전국의 각종 물품과 사람들은 한강의 나루터로 모여들었고, 그들이 가꾼 문화는 다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한강의 나루터는 이렇듯 사람의 왕래를 위한 교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물자의 운반을 위한 수송로 역할에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초소로서의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따로 관리를 파견해 한강의 나루터를 지키게 했다.

▲ 국립 서울현충원 전경. 이곳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쓰다 순국한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조선시대엔 현재 한강의 서울 지역에 속하는 구간에 10여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상류부터 광나루·삼밭나루·뚝섬나루·두모포·입석포·한강나루·서빙고나루·동작나루·흑석진·노량진(노들나루)·용산진·마포나루(삼개진)·서강나루·양화나루·공암나루 등이다. 이 중에서 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량진·양화나루는 한강의 5대 나루로 꼽혔고, 2대 나루터라 하면 광나루와 노량진을 일컬었다.

길은 연속성이 있다. 그래서 나루터의 전통은 지금의 한강에 걸린 다리로도 이어졌다. 광나루엔 광진교·천호대교, 삼밭나루엔 잠실대교, 뚝섬나루엔 영동대교, 두모포엔 동호대교, 입석포엔 성수대교, 한강나루엔 한남대교, 서빙고나루엔 반포대교, 동작나루엔 동작대교, 흑석진엔 한강대교, 노량진엔 한강철교, 용산진엔 원효대교, 마포나루엔 마포대교, 서강나루엔 서강대교, 양화나루엔 양화대교·성산대교, 공암나루엔 행주대교가 각각 세워져 있다.

서울 남서부 대표 나루터인 노량진(鷺梁津)은 일명 노도(路渡·露渡), 노량도(鷺梁渡)라 불리던 노들나루다. 백로들이 많이 날아와 ‘노들’이라고 했다는데, 민요 ‘노들강변’에도 나오듯이 노량진에서부터 양화진까지는 버드나무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지금의 노량진수원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노량진 나루터가 있던 지점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에 그린 서울 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보물 제850호)를 보면 한강 유역까지 자세히 나와 있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노량진엔 별감이 배치되어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게 하였고, 노량진 남쪽 언덕엔 노량원(鷺梁院)이란 여관도 있어 공무로 도성을 오가는 관리들이 쉬어갔다. 연산군 때엔 한강의 모든 나루터를 봉쇄하고 이 노량진으로만 통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할 때 처음 닦은 시흥로(始興路)는 조선시대 도성에서 한강을 건넌 뒤 노량진·시흥·수원을 거쳐 충청도·전라도로 통하는 주요 간선도로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이곳이 한강의 대표적인 나루터가 된 까닭은 우선 숭례문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유속도 느리고, 강폭도 좁고, 강변 양쪽이 높아 배다리를 놓기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배로 다리를 연결한 배다리, 즉 주교(舟橋)로 한강을 건넜다. 1795년 정조가 배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정조대왕 능행도’ 가운데 노량주교 도섭도(鷺梁舟僑 渡涉圖)를 보면 한강을 건널 때 정조가 쉬어가던 노량진 행궁도 보인다. 현재 이곳엔 1791년에 세운 용양봉저정이 남아 있다. 정자의 이름은 ‘용이 뛰놀고 봉이 높이 난다’는 뜻이니 왕과 관련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1)이번 서울 남서부 기행은 이른 아침에 국립 서울현충원의 현충탑에서 묵념을 드리는 일로 시작했다. /(2)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묘소. 현재 이곳엔 국가원수 2위를 비롯해 임시정부요인,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무명용사 등이 안장되어 있다. /(3)현충탑 오른쪽에 조성되어 있는 호국영웅상.

 

정조는 이전엔 용선(龍船)이나 부교(浮橋)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는데, 이것도 번거롭기 때문에 주교를 가설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주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비변사에서 올린 주교 운영방안이 미흡하자 정조는 1790년(정조 14) 직접 설치장소의 상황부터 강폭, 배 선정, 배의 수와 높이 등 기술적인 면을 비롯해 배를 동원하는 데 필요한 행정적인 방법도 제시할 정도였다. ‘주교지남(舟橋指南)’은 바로 정조가 주교의 운영방안에 대해 저술한 책이다.


어쨌든 정조 이후 노량진은 한강의 으뜸 나루터로 거듭났다. 남부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대부분의 물류는 거의 이곳을 지나갔다. 즉 노량진을 지나야 비로소 서울을 벗어난 것이요, 노량진을 건너야지 비로소 서울에 들어선 것이다. 1899년에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이곳 노량진에서 제물포(지금의 인천)까지 개통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당시 노량진은 도진취락의 기능이 한층 강화되었으나, 1900년 한강철교가 세워지고 1917년에 한강인도교가 건설되면서 점차 그 명성을 잃고 말았다.

나루터와 한강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한강대교를 건너야하는데, 승용차가 아니라 반드시 걸어야 한다. 6·25전쟁 때 후퇴하는 국군이 폭파하는 바람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서민들 ‘자살다리’로도 오명을 갖고 있는 한강대교. 이 길손이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자리 잡고 살면서 제일 먼저 걸어서 건넜던 다리도 이 한강대교였다.

▲ 6·25전쟁 때 후퇴하는 국군이 폭파하는 바람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자살다리’라는 오명도 갖고 있는 한강대교.

 

이 한강대교가 걸려있는 노들섬(중지도)은 하중도(河中島)다. 강 가운데 떠있는 섬 하중도는 상류로부터 떠내려 온 토사가 쌓여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물길이 바뀌면서 섬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과거 한강엔 팔당 하류만 해도 양수리 하중도, 당정·미사 하중도, 토평·석도 하중도, 잠실 하중도, 뚝섬, 신사·반포 하중도, 여의도, 난지도, 능곡 하중도, 신평·노고 하중도 등 수많은 하중도가 있었다.



노들섬이 모래밭에서 섬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였다. 1917년 일제는 한강 북단의 이촌동과 남단 노량진을 잇는 한강인도교를 건설하면서 다리가 지나는 모래밭에 흙을 돋워 다리 높이로 쌓아올리고 중지도라고 이름 붙였다. 1930년대엔 노들섬까지 전찻길이 놓여 한강인도교역도 생겼다. 그래도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섬 동쪽의 고운 모래밭을 ‘한강백사장’이라 부르며 여름엔 피서지로,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이용하며 즐겼다.

▲ 한강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한강 유람선. 하지만 어찌 조선시대의 황포돛배의 흥취에 비기겠는가.

 

하지만, 1968년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으로 이 노들섬은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다. 한강 북단 이촌동 연안을 따라 한강제방도로, 즉 지금의 강변북로를 건설할 때 한강을 따라 나있던 경원선 바깥쪽에 새로운 둑을 쌓으면서 한강 백사장에서 퍼온 모래를 사용한 것이다. 동부 이촌동과 서부 이촌동의 땅 일부도 이때 한강 백사장에서 퍼온 모래를 메워 얻은 것이다. 그러다 1973년 노들섬 확장매립공사를 할 때 한강 백사장 모래를 사용하면서 한강 백사장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자리로 강물이 흘러가면서 지금의 노들섬이 태어난 것이다.



결국 고운 모래가 넓게 펼쳐졌던 모래밭이었던 노들섬은 한강의 상처를 안고 탄생한 섬임을 알 수 있는데, 최근 서울시에서는 여기에 오페라하우스를 지을 예정이라 밝혔다. 그다지 나쁜 생각 같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그 옛날 인파가 한강 백사장을 메웠듯이 모래밭 복원 등을 통해 한강을 본래의 자연형 하천과 가깝게 만든 뒤 좀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이왕에 하중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강 물줄기를 따라가며 하중도에 대해 살펴보자. 한강 하중도 가운데 맏형인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나의주(羅衣洲)·나의도(羅衣島) 등 다른 이름도 많았다. 조선시대엔 이곳에 목장이 있어 관원을 파견해 목축을 감독하였으며, 궁중이나 나라 제사에 필요한 제물도 제공하였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엔 특별히 ‘백사주 이십리(白沙周 二十里)’라 씌어 있으니 여의도엔 고운 모래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나 갈매기 한가롭게 노닐던 모래밭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비행장이 만들어지면서 아름다움을 조금씩 잃기 시작했다.

▲ 서울에서 거래되는 전체 수산물 중에서 약 50%를 차지하고 있는 노량진 수산시장. (왼쪽) / 노량진 수산시장의 한 상인이 손님을 기다리며 수산물을 손질하고 있다. 이곳에선 새벽엔 경매 구경을 하고, 저녁엔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다. (오른쪽)

 

그래도 여의도비행장은 당시 한강인도교와 마찬가지로 서울의 명물이었던가 보다. 1920년 이탈리아 비행기가 동경으로 가던 길에 여의도에 착륙함으로써 당시 시민들의 커다란 구경거리가 되었고, 1922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고국방문 비행으로 여의도비행장에서 시범비행을 보이자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여의도비행장은 1958년 김포공항으로 국제공항이 이전하자 공군기지로 사용되다가 1971년 폐쇄되었다.



여의도가 지금처럼 변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역시 1968년의 한강개발계획이다. 이때 여의도 둘레에 높이 16m, 폭 21m, 연장 7km의 제방, 즉 윤중제를 쌓으면서 옛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개발의 어두운 그림자인가. 아니면 안목이 없는 천박한 개발 만능주의인가. 한강의 하중도 중에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던 밤섬(栗島)도 이때 훼손되었다. 윤중제를 쌓은 뒤 땅을 돋우는 데 필요한 돌과 흙을 구하기 위해 이 섬을 폭파했기 때문이다. 이후 여의도엔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언론기관·금융기관·증권거래소·사무실용 빌딩 등이 잇달아 건설되어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현대적인 수상도시로 이름이 높다.

▲ 한강대교가 걸려있는 노들섬은 원래 넓은 모래밭이었으나 1917년 한강인도교 건설 당시 흙을 돋우면서 섬이 되었다.(왼쪽) / 한강 남쪽 언덕을 따라 이어진 올림픽대로. 서울 동서의 교통을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사람과 강을 단절시켰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오른쪽)

 

하지만 밤섬을 파괴한 일은 정말 아쉽다. <서울명소고적>엔 ‘맑은 모래가 연달아 펼쳐져 한강과 묘하게 서로 어울려 풍치가 빼어났다’고 밤섬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있다. 밤섬 상류쪽으로 넓게 펼쳐진 흰 모래밭은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여 일찍이 마포팔경의 하나에 속했다.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그린 밤섬이란 산수화로나마 그 아름다움을 짐작해본다.



밤섬의 작고 나지막한 언덕엔 민가 1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주변으로는 널찍한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곳곳에 버드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제법 풍치가 좋았다. 조선시대엔 이곳에 뽕나무와 약초 따위를 심었고, 양이나 염소를 놓아기르기도 했다. 주민들은 주로 고기잡이나 나룻배 운영으로 생활하였다. 바다도 아닌 강이 만든 섬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 (1)동작구 노량진로에 있는 사육신 묘. 예로부터 알려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외에 1977년 김문기의 가묘도 추봉하면서 모두 7명이 되었다. /(2)사육신 묘비는 관직명이나 호를 새기지 않고 모두 성씨지묘, 하씨지묘, 성씨지묘 등 성만 나타내는 간단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3)사육신 묘 뒤쪽 언덕에 있는 폐묘. 민간에선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복위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성승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풍경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여름철 백사장엔 피서 인파가 넘쳤고, 봄가을엔 강물에 배를 띄우거나 언덕 위에 올라 강변 풍치를 즐겼다. 그러나 1968년 윤중제 공사 당시 이곳 주민들을 창천동으로 이주시키고 폭파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지금은 서강대교가 밤섬 위를 지나는데, 섬의 뿌리는 남아 있었는지 다행스럽게도 이후 이곳에 다시 모래섬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최근엔 식생이 복원되어 각종 철새들이 찾아들고 있다. 하지만 한번 잃어버린 풍광은 어찌 되찾을 수 있을까.



여의도 하류쪽에 있는 선유도(仙遊島) 역시 비슷한 풍파를 겪었다. 이 섬은 지금은 하중도이지만 이 역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강변에 솟은 선유봉(仙遊峯)이란 아름다운 언덕이었다.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양천팔경첩 중 ‘선유봉’을 보면 과연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는 이름이 헛되지 않을 정도의 절경이다. 하지만 이 선유봉 역시 일제강점기 때 홍수를 막고 길을 포장하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깎여나갔다. 선유봉은 폭파되었고, 고운 모래도 파헤쳐져 지금처럼 보잘 것 없는 평평한 섬이 되어 버렸다.

이후 선유도는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남서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었다. 2000년 폐쇄된 뒤 다행스럽게도 정수장을 재활용해 물을 테마로 한 생태공원으로 만들어 지금은 서울 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도심의 생태 테마공원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이 역시 어찌 옛 선유봉의 아름다움만 하겠는가.

출처 : 미래를 준비하는 삶
글쓴이 : 소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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